데루오카 이쓰코 명예 교수/사진=한겨레 신문
1989년 일본 거품경제 전성기,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경제학자 데루오카 이쓰코(96, 사이타마대 명예교수)의 책 *‘풍요로움이란 무엇인가’*는 일본 경제의 허상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당시 일본은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자부심을 누리고 있었지만, 그냐는 일본 경제를 “뿌리 없는 사상누각”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녀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32년이 흐른 지금, 데루오카 교수는 한국을 처음 방문해 일본의 실패 경험을 한국과 공유하며 연대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특별 강연을 열었다. 5일 서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강연에서 그는 일본 경제와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솔직히 털어놓으며 한국에 경고를 전했다.
데루오카 교수는 강연에서 일본 경제를 “거품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던 시대”로 회고했다. 1980년대 말 일본 경제는 폭발적인 성장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았지만, 거품이 터지며 일본은 장기 불황에 빠졌다. 이는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며 일본 경제의 침체기를 상징한다.
“일본은 경제성장률 0.6%라는 초라한 성적표와 함께 세계 경제에서 한때 차지했던 위상을 잃었습니다. 이제는 미국, 중국, 독일에 이어 4위로 떨어졌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24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녀는 일본 경제가 회복되지 못한 이유로 구조적 문제를 꼽았다. 잘못된 양적 완화 정책과 부채 급증, 저출생·고령화로 인한 인재 고갈, 그리고 지나치게 경쟁 중심인 교육 시스템이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데루오카 교수는 한국 경제에 대해 “요즘 일본과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는 경제 성장만을 쫓는 자본주의가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한국이 일본의 실패를 통해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 독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경험한 사례를 공유했다. 독일에서는 노동자들이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무료 교육과 복지 혜택이 당연하게 제공됐다. “자본주의는 국민의 삶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일본처럼 돈을 우선시하는 경제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92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데루오카 교수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사회를 변화시킬 주체는 거대 정치가 아니라 개인들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0년부터 도쿄 네리마구에서 시작한 ‘대화적 연구회’를 예로 들며 “평범한 주민들이 모여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민주주의의 주인공이라는 자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작은 모임이 150번 넘게 이어졌고, 저는 이런 대화를 지하철역의 수만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를 통해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강연 말미, 그는 젊은 세대에게 세 가지 당부를 전했다.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한국이 일본의 과거 잘못에 대해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야 일본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데루오카 교수의 강연은 단순한 과거 회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였다. “풍요로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질문은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유효하다.
그녀의 메시지는 일본과 한국이 과거의 아픔을 딛고, 서로의 경험을 통해 배우며 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